라온칼럼

  • 2015-10-16
  • 결혼한지 십여 년 되는 부부가 진료실을 찾았습니다.
    부인은 자신들이 현재 권태기에 들어선 것인지 남편이 자신과의 대화를 꺼린다고 하였습니다.

    무슨 일이 있을 때 남편에게 의견을 물으면, 남편은 알아서 하라고 하며 별 관심을 기울여 들어주지 않았다가, 조그만 잘못이라도 생기면 자신을 질책하곤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남편이 잘못한 점에 대해서 이야기하려 하면, 남편은 부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화부터 낸다고 하였습니다.
    남편은 부인 또는 자기들 부부가 대화를 할 줄 모르는 것 같아서 아예 피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자신도 대화가 필요하다는 것은 알지만, 그럴 때마다 싸움이 되곤 하니까 아예 피하거나, 미리 큰소리를 쳐서 싸움을 피하려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상담을 통해서 부부 대화기술을 배울 수 있으면 부부 관계가 나아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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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부에게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남편은 부부싸움을 하더라도 적당한 선에서 멈출 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내가 과거의 모든 것을 다시 꺼내어 이야기하는 것 때문에 참아내기가 힘들다고 했습니다. 남편은 이 사람처럼 기억력이 좋은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나는 이미 기억 나지 않는 옛날 일들을 끄집어내서 꼬치꼬치 잘잘못과 이유를 따지는데, 도저히 어떻게 대해야 할 지를 모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를 피하려고 할 때면 부인이 더 화를 내어 싸움이 커지게 되니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거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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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인은 문제가 생기면 정확하게 매듭을 지어야 하는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자신과 달리 매사를 적당히 넘어가려고 합니다. 부인은 남편의 그런 점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럴 때 곧바로 남편에게 말을 꺼내면 싸움이 되는 것을 여러 번 경험하였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말을 꺼내기로 하고 일단 참았다가 남편이 기분이 좋을 때를 기다렸다가 이야기해보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때가 되면 남편은 이미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발뺌을 하고 대화를 피하기 때문에 화가 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부인은 남편이 내 말에 관심을 보이고 또 적절한 반응을 보이면 그럴 리가 있겠냐는 겁니다.

    이 부부는 자신들의 대화기술이 서툴러서 싸움이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대화를 나누기 어렵게 만드는 진짜 원인은 각자가 상대에 대한 가지고 있는 좋지 않은 감정 때문이라는 점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몇 차례의 상담을 통해서, 부인은 지금은 무신경해 보이는 남편이 과거에는 자신의 잘못을 너그럽게 받아주었던 아량 넓은 남자로 보였던 기억들을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필자는 그런 멋진 남자에게 말을 붙일 때 어떻게 하는지를 묻고, 남편에게도 그처럼 말을 꺼내도록 했습니다. 그러자 남편이 언제 자리를 피할지 몰라 잘못한 사람을 다그치듯 몰아서 말하던 부인의 대화 태도가 달라질 수 있었습니다.

     

    남편은 부인과 같이 있으면 무슨 꼬투리를 잡힐지 몰라 그런 기회를 피하려고 했었지만, 자신의 너그러웠던 모습을 기억하며 감사해하는 부인을 보면서 자신이 더 잘 해주어야겠다는 마음과 자신감을 회복하였습니다. 또 부인의 대화 요구가 자신의 잘못을 따지기 위한 것이 아니라, 관심을 기울여주고 책임을 함께 나누기를 바라는 것이었을 이해하자 부인을 피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대개의 경우, 특히 감정이 섞인 사건에 대한 여자의 기억력은 남자보다 뛰어납니다.

    하지만 그 뛰어난 기억을 잘못 사용하면,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처럼 위험해 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판도라의 상자에는 위험한 것들뿐 아니라희망도 함께 들어있음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 부부도 지금 당장 눈 앞에 보이는 상대의 공격적인 모습 때문에 부부 관계 자체가 위협을 받았지만, 그 본바탕에는 함께 잘 살고 싶어하는 소망이 있음을 이해하고 나서는 부부관계를 회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